▲ 경기도 파주출판도시 내 ‘지혜의 숲’ 일부는 24시간 시민들이 책을 읽을 수 있게 무료 개방하고 있다. |
경기도 파주시 산남면, 심학산이 바라다보이는 곳에 7~8월이면 연꽃이 만개한 장관이 펼쳐진다. 1만3000㎡(4000여평)에 달하는 연 농장을 만든 사람은 이수안 대표이다. 이 대표가 연 농사를 시작한 것은 2007년이었다. 평생 자영업을 하던 이 대표는 농사 경험이 전혀 없었다. 막막하던 이 대표는 파주시에 있는 교하도서관에서 농사를 배웠다. 이 대표는 도서관에 들를 때마다 한 보따리씩 농사 관련 책을 대출해 특용작물에 대한 연구를 했다. 1인당 대출 제한이 있어 두 아이 이름까지 빌렸다. 특히 무농약 농법이 한국보다 앞서 있는 일본 서적은 귀한 공부가 됐다. 덕분에 심학산 연꽃 농장은 이 지역 명소가 됐고 연근 상품도 인기다.
여행책 13권을 펴낸 여행작가 최갑수씨도 도서관 예찬론자이다. 세 아이의 아빠인 최씨는 주말이면 온 가족이 집 근처에 있는 교하도서관 나들이를 한다. 각자 원하는 책을 읽기도 하고 도서관 옆에 있는 공원을 산책하기도 한다. 최씨의 설명이다. “사무실을 따로 둘 필요가 없다. 도서관만큼 좋은 공간이 없다. 필요한 자료 다 있고, 편의시설도 잘 돼 있다. 게다가 공짜다. 교하도서관에서 내 책 중 3권을 썼다. 도서관에서 혜택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기업 강의는 거절을 해도 도서관 강의는 무조건 ‘OK’다. 문화강좌 수준도 굉장히 높다.” 최씨는 곧 이사를 가야 하는데 집을 구하는 조건 1순위가 도서관이 가까운 곳이라고 했다.
파주, 도서관 천국으로
“한 나라의 과거를 보려면 박물관으로 가고, 미래를 보려면 도서관으로 가라”는 말이 있다. 불과 20년 전, 서울 남산도서관 앞에서 책가방 들고 자리전쟁에 나선 새벽 도서관족은 우리나라 신문의 단골 뉴스였다. 남산도서관은 사실상 남산독서실이었다. 칸막이 열람실에서 입시전쟁 전사들을 키워낸 과거의 도서관이 ‘경쟁’이라는 족쇄를 찬 오늘을 만들었다면, 요즘 도서관에서는 다른 미래를 기대할 수 있다.
도서관들이 바뀌고 있다. 열람실에선 칸막이가 사라지고, 천장까지 꽉꽉 채운 서가들은 키를 낮춰 사람들과 눈높이를 맞췄다. 공부방 대신 아이들이 뒹굴면서 즐겁게 책과 친해질 수 있는 공간들이 등장했다. ‘엄숙’과 ‘정숙’을 강요하던 공간은 소통과 토론의 장이 되고 있다. 다양한 북콘서트가 줄을 잇고 도서관 로비에서 연주회가 열리는가 하면 영화도 상영한다. 동네 안으로, 주민 생활 속으로 들어간 도서관은 책을 매개로 문화 사랑방, 평생교육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도서관 생태계의 진화를 들여다보기 위해 주간조선이 주목한 곳은 경기도 파주시이다. 파주출판도시를 기반으로 하고 있기도 하고, 2010년 ‘책 읽는 파주’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동네 도서관 짓기에 나서면서 파주시는 ‘도서관 천국’으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취재하는 동안 “도서관 때문에 파주에 이사 왔다”는 이야기를 여러 차례 전해 들었다. 파주시는 2년마다 시행하는 경기도 시군 공공도서관 평가에서 2013년에 이어 2015년에도 우수지자체에 선정됐다.
인구 43만명의 파주시에는 공공도서관이 13곳, 작은도서관 55곳(공립 6곳, 사립 49곳)이 있다. 군부대가 많은 지역의 특성상 병영도서관도 13곳이 있다. 1월 개관하는 탄현도서관까지 포함하면 공공도서관 1곳당 인구는 3만700명이다. 독일(1만225명), 영국(1만5200명)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미국(3만3000명), 일본(3만9000명)보다 낮다. 한국은 2013년 말 기준 5만9000명으로 선진국 수준에는 한참 못 미치지만 2009년부터 1차 도서관발전종합계획과 함께 공공도서관이 크게 늘어 2009년 703곳에서 2014년 말 930곳에 이르고 있다. 한 달에 3.8곳꼴로 전국에 새로운 도서관이 세워진 셈이다.
여기에는 지자체들의 경쟁도 한몫하고 있다. 민선 4기 지자체장 선거에서 경쟁적으로 등장한 구호가 ‘책 읽는 도시’ ‘도서관 도시’이다. 군포, 김해, 용인, 고양 등 ‘책’을 정책 목표로 내세운 지자체가 50여개에 이를 정도이다. 작은도서관 운동도 전국으로 확산됐다. 1990년대 이후 문화사랑방 역할을 내세우며 아파트, 골목 곳곳에 생기기 시작한 전국의 작은도서관은 2014년 말 5234곳에 이른다.
2012년에는 작은도서관진흥법도 제정됐다. 작은도서관은 ‘면적 33㎡, 장서 1000권가량의 마을문고’를 지칭한다. 누구든 조건만 충족하면 작은도서관으로 신고할 수 있다. 문제는 우리나라 독서인구 비율이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09년 62.1%, 2013년 62.4%로 큰 차이를 보이지 않다가 2015년에는 56.2%로 오히려 감소했다. 도서관 경쟁에 나선 지자체들이 고민해야 하는 지점이다.
주민이 도서관을 키운다
파주 도서관은 그런 점에서 눈여겨봐야 할 부분이 많다. 파주 도서관 생태계는 건강한 피라미드 구조이다. 중앙도서관을 중심으로 교하, 문산 등 지역거점 도서관이 있고 그 밑에 분관 도서관들이 위치해 있다. 그 사이사이에 55곳의 작은도서관들이 있고, 각 도서관 속에는 수많은 동아리들이 활동하고 있다. 유기적으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는 이들이 파주 도서관 문화를 살아 움직이게 하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일방적인 관 주도가 아닌 시민이 머리를 맞대고 도서관 정책부터 운영까지 함께 고민하고 답을 찾는다.
도서관 정책에 시민을 끌어들이고 네트워크를 구축하기까지 파주 도서관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교하도서관의 윤명희(47) 관장이다. 그는 도서관 정책만 20년 넘게 담당해왔다. 이 지역 도서관·출판계 관계자들은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사람들은 그를 ‘도서관의 작은 거인’으로 부른다. 현재는 파주시청 내에 도서관 업무를 전담하는 도서관정책팀이 별도로 있지만 그가 활동을 시작하던 초창기에는 담당자라곤 달랑 한 명이었다. 윤 관장은 “예산도 없어 시민을 끌어들이는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는 어머니 독서교실을 만들고 동아리를 만들었다. ‘리더학교’를 만들어 책에 관심이 있는 시민을 모으고 ‘책 읽는 도시 파주’를 만들기 위한 정책을 공유했다.
작은도서관을 쫓아다니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지원을 위한 평가 기준을 마련했다. 동네 부녀회 회의가 있는 곳은 쫓아가서 도서관 설명회를 갖고, 파주출판도시의 출판인들도 끌어들여 공존을 모색했다. 철통방어 군부대 문을 두드려 병영도서관을 만들고 책 읽는 내무반으로 유도했다. 군 장병 독서감상문 대회, 독서퀴즈 대회를 열고 부상으로 휴가를 주게 하는 등 군인들의 호응을 이끌어냈다. 요즘엔 사단장, 대대장들이 더 관심을 갖고 병영도서관 만들기에 나서고 있다. 그를 구심점으로 각각의 모임들이 씨줄 날줄이 되어 탄탄한 네트워크가 만들어졌다.
그 네트워크가 바로 파주 도서관의 원동력이다. 다양한 모임을 묶어주고 끌어내기 위해 시민과 정책한마당, 지식벼룩시장 등 행사도 활발하다. 그중 책 읽는 파주를 넘어 토론하는 파주를 만들기 위한 ‘夜한토론회’는 인기 프로그램이다. 직장인들도 참여할 수 있게 밤에 열리는 ‘夜한토론회’는 책 한 권을 선정한 후 파주 시민 누구나 참여해 독서토론을 벌이는 행사이다. 지난 12월 15일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책을 주제로 열린 10회째 夜한토론회에는 각 도서관 동아리를 비롯해 초등학생부터 일반 시민까지 100여명이 참여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공간을 바꾸다
공간이 바뀌면 생각도 바뀌고 역할도 바뀐다. ‘독서실’ 문화를 탈피하기 위해 파주시는 도서관에서 먼저 공부방을 없앴다. 공공도서관 13곳 중 공부방이 있는 곳은 중앙도서관 등 4곳에 불과하다. 교하도서관을 시작으로 분관인 해솔, 물푸레, 한빛, 가람 등 2010년 이후 새로 지어진 도서관에는 공부방 공간이 없다. 공부방을 없애자 시청에 민원이 쏟아지는 등 시민 반발이 컸다. 현재도 찬반 논란은 진행 중이다. 윤 관장은 “자료실 키우고 사서도 늘리고 도서관 핵심기능을 키우기 위해 전력을 해야 하는데 공부방을 만들면 야간운영, 식당 등 불필요한 부분에 신경을 써야 한다. 도서관 문화를 바꾸는 데 공부방 없애기는 중요한 문제다”라고 말했다.
물리적 거리가 가까워지면 심리적 거리도 가까워진다. 작은 공원을 끼고 조성된 교하·운정지구 도서관은 모두 고층 아파트 숲 가운데 있다. 해솔도서관 동아리 중 하나인 ‘해솔맘’ 회원인 주부 김옥천씨는 “동네 슈퍼 가듯 도서관에 오게 된다. 아이를 키우면서 모르는 것이 있으면 무조건 도서관으로 왔다. 도서관이 아이를 함께 키웠다”고 했다. 두 아이의 엄마인 변선희씨는 “아이들이 공부를 하다가도 모르는 것이 나오면 도서관으로 뛰어간다. 십진분류법에 따른 도서관 배열 위치를 훤히 꿰고 있을 정도다”라고 말했다.
외관도 내부도 관공서의 느낌은 찾아볼 수가 없다. 도너스 모양의 건물, 온돌방 열람실, 미닫이문, 통유리 창으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로비…. 거실 같은 도서관은 마음의 문턱도 없앴다. 지난 12월 18일 찾은 물푸레도서관은 입구에서부터 신발을 벗어야 했다. 내부가 모두 온돌 바닥으로 돼 있기 때문이다.
1층은 어린이들을 위한 공간, 2층은 가족 공간으로 꾸며져 있었다. 키 낮은 서가 사이로 다양한 공간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발바닥으로 온기가 전해지니 그대로 바닥에 앉아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들었다. 도서관이 아닌 옆집에 놀러온 듯 편안했다. 이곳에선 주말이면 온 가족이 바닥에 누워 책을 읽는 풍경을 흔하게 볼 수 있다고 한다. 박현경 주임사서는 “간혹 잠이 들어 코를 고는 사람도 있다”고 귀띔했다. 해솔도서관의 로비는 북카페가 부럽지 않다. 통유리 바깥으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이곳은 동네 사람들의 만남의 장소이다. 해솔도서관도 열람실이 모두 온돌 바닥으로 돼 있다.
도서관별로 도서나 행사들을 가능한 특화를 시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운영할 수 있고 도서구입도 효율적으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음악을 특화한 가람도서관은 아트홀과 외부공연장을 갖추고 있다. 클래식 재즈 공연, 피아노 독주회, 모닝콘서트 등 무료공연이 다양하게 열린다. 영어를 특화한 한빛도서관은 ‘달콤한 영어그림책’ ‘영단어 길들이기’ 등 영어 프로그램이 많다. 교육을 내세운 해솔도서관은 ‘생활과학교실’, 생후 12개월부터 시작하는 ‘북스타트’ 등 교육 프로그램이 강하다. 가족 도서관 물푸레는 가족과 함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고민한다. 그중 ‘보물찾기’는 인기 프로그램이다. 서가에 꽂힌 책 속에 책을 읽어야 알 수 있는 문제를 적은 쪽지를 숨겨놓고 찾게 했다. 도서관은 보물을 찾느라 책장 뒤집기에 나선 사람들 때문에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본관 격인 교하도서관은 출판사와 연계한 기획, 저자와의 강연, 문화강좌 등이 많다. ‘출판사, 도서관에 말걸다’란 제목으로 공간 한쪽은 기획도서전 코너를 만들었다. 3층 일부는 아예 지역 미술인들을 위한 전시장으로 내놓았다. 대관료 없이 무료로 공간을 제공하는 이곳에서는 매주 전시가 바뀌고 있다. 보드게임 행사 등 학생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프로그램도 신경을 쓰고 있는 부분이다. 도서관끼리 연계도 잘 돼 있다. 휴관일을 다르게 하고 집 근처 도서관에 없는 도서는 신청하면 다른 도서관에서 배달해 주는 책 배달 서비스를 해주고 있다. 파주 시민들은 굳이 공연을 보기 위해, 인문학 강좌를 듣기 위해, 필요한 책을 구하기 위해 멀리 갈 필요가 없다.
작은도서관을 만드는 사람들
황 관장이 ‘꿈꾸는 교실’을 시작한 것은 엄마들을 바꾸고 싶어서였다. 작은도서관을 열기 전 참부모 교육운동을 10년 넘게 했는데 바뀐 것이 없더란다. 학원에 치이고 성적에 치인 아이들의 삶이 너무 안타까웠다.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는 엄마를 먼저 바꿔야 했다. 책 읽어주기부터 시작해 책에 나오는 풍경 그리기, 미니어처 만들기 등 책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봤다.
작은도서관의 힘은 컸다. 엄마도 바뀌고 아이들도 달라졌다. 14년간 수천 명이 이곳을 거쳐갔고 수많은 자원봉사 활동가가 탄생했다. 활동가들은 파주 지역을 넘어 전국 각지에 작은도서관 문화를 전파하고 작은도서관을 만들기 시작했다. 10년이 넘어가면서 ‘꿈꾸는 교실’에 오는 사람들이 줄기 시작했다. 이곳에만 있던 프로그램들이 활동가들을 통해 곳곳에 확산됐기 때문이었다. ‘슬리퍼 끌고 아이 손 잡고 갈 수 있는 도서관들이 생기면 문을 닫겠다’는 첫 결심대로 ‘꿈꾸는 교실’을 닫았다. 황 관장의 꿈이 이뤄진 것이다.
‘꿈꾸는 교실’처럼 책을 매개로 사람들을 연결하는 공간이 작은도서관이다. 파주지역에 있는 49곳의 사립 작은도서관들은 대부분 황 관장처럼 사명감을 갖고 공간을 운영하는 사람들이다. 파주시는 이들 작은도서관을 대상으로 매년 평가를 거쳐 22곳에 2억3800만원을 지원하고 있다.
황 관장은 “대부분 공공과 사립도서관의 관계가 좋지 않은데 파주시의 경우 서로 보완관계이다. 작은도서관을 파주에서 한다는 것은 행운이다”라고 말했다. 평화도서관은 물푸레도서관과 ‘친구’ 사이이다. 물푸레도서관 한쪽 공간에는 평화도서관 전시 코너가 있다. 공공도서관 동아리들이 인력이 부족한 작은도서관에 봉사활동을 나가기도 한다. 황 관장은 작은도서관의 가장 큰 문제는 인력이라고 했다. 사서 한 명이 절실한데 작은도서관의 여건상 인건비를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다. 평화도서관의 경우는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다. ‘꿈꾸는 교실’에서부터 이어진 회원 400여명이 조금씩 힘을 보태고 있다. 도서정가제 실시 이후 부담이 크게 늘어난 도서구입비는 작은도서관은 물론 공공도서관들의 공통된 문제이다.
파주시가 도서관 천국으로 자리 잡은 데는 이재홍 파주시장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이 시장의 설명이다. “기초자치단체에서 도시발전의 핵심가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시민의 삶이 달라진다. 이제 도서관은 책을 매개로 문화와 예술, 평생교육을 아우르는 것은 물론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아내는 아이디어 뱅크의 역할까지 하고 있다. 책 읽는 것을 넘어 토론하는 파주가 목표다. 현재 도서관 예산은 파주시 총 예산의 1.2%로 87억원 규모이다. 이를 2%까지 높여야 한다.”
파주시는 새해부터 출판도시·코레일과 손잡고 경의중앙선에 ‘독서바람열차’ 운행을 준비하고 있다. 또 폐교를 활용해 가족독서캠핑장을 만들고 ‘별빛 품은 도서관’을 운영할 계획이다.
빌 게이츠는 “오늘의 나를 만들어준 것은 조국도 아니고 어머니도 아니고 동네 도서관이었다”고 말했다. 기사의 맨 앞에서 소개한 사례들처럼 파주 도서관은 주민들의 삶을 바꾸고, 또 그 주민들이 도서관을 바꾸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도서관은 누군가의 삶을 바꾸는 기적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